고봉선생

고봉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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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첨부파일

증수충익모광국공신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의금부성균관춘추관사 덕원군 시문헌공행통정대부사가원 대사간 고봉선생 기공행장 정홍명 기암 기암 정홍명 지음 선생의 휘는 대승, 자는 명언, 성은 기씨인데 행주인이다. 행주에서 고봉 속현이 있었으므로 인하여 자호를 고봉이라 하였다. 기씨는 고려조에 무예로 장상을 지낸이가 꽤 많았다. 아조에 들어와서는 휘면이라는 분 공조 전서를 지냈다. 이분이 휘건을 낳았는데, 그는 세종조에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고, 문종 말기에 나이오십세도 안 되어 치사하였

묘비첨부파일

증 수충익모광국공신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 경연의금부성균관춘추관사 덕원군 시문헌공행통정대부사간원대사간 고봉선생 기공비문 자효증 함재 선생의 휘는 대승 자는 명언 호는 존재이며 본관은 행주이니 본 고을에 고봉이 속해 있으므로 세칭 고봉선생이라 불렀다. 증조 휘 축은 풍저창부사로 증좌승지하고 조 휘 찬은 홍문관 응교로 증이조참판이며 부 휘 진은 경기전 참봉으로 증순충보작공신의정부 좌찬성하고 덕성곤에 봉하였고 제 준과 함께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가훈을 받들며 정성으로 지켜 잠시도

신도비첨부파일

문헌공 고봉 기선생 신도비병 병서 고봉선생이 서거 하신지 431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다. 우리나라에는 그 동안 치란과 흥망의 자취가 전광석화처럼 지나갔고 왕조도 점차 쇠퇴하여 마침내 경술년의 국치를 당하였으며 광복 후에도 국토가 양단되고 국론이 분열되어 마침내 내란을 초래하였다. 다행히 근년에 국운이 다소 진작되고 있으나 남북통일은 아직 되지 못한채 이륜이 거의 상실되고 풍속도 갈수록 퇴패하고 있다. 이 때에 당하여 선생의 16대 주손인 성근이 장차 선생의 묘도에 비를 세우기로 하고 나를 찾아와 비석

시장첨부파일

증수충익모광국공신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의금부성 균관춘추관사 덕원군 시문헌공행통정대부사가원 대사간 고봉선생 기공시장 이 식 택당 공의 휘는 대승, 자는 명언인데, 세상에서 고봉 선생이라 칭하기하고 혹은 존재라고도 칭한다. 기씨는 본디행주인인데, 행주는 지금 경기 고양군에 예속되었다. 그의 선대는 고려 때에 현달했는데, 장상과 훈척의 융성함이 국사에 갖추 실려 있다. 아조에 들어와서는 휘 면에 공조 전서를 지냈다. 이분이 휘 건을 낳았는데, 건은 판중추원사로

낙암기

십일대손 동준 근찬 십일대손 원달 근저 고봉선생 낙암 유허비 낙암구지 낙암은 조선중기 문헌공 고봉 기대승선생께서 성리학을 강학하신 유터이다. 고봉선생 사십사세되시던 선조삼년 경오년 오월에 낙암을 지으시고 그 아래 동편에 수간의 집을지어 찾아오는 학자들을 거처케하고 동료라 하였다. 선생은 퇴계 이황선생에게 보낸 서찰에서 가근산애에 신축소암하여 의위서지지소하고 욕이낙자액지하니 개취전서소시빈당익가락지어하여 용우비심지소원모자라 하시니 퇴계선생은 낙암액자와 낙암기를 지어 보내주셨다. 선조오년 십일월 초일일 선생 향년 사십육세로

귀전암기첨부파일

귀전은 선조 문헌공 고봉선생이 학업을 강론하던 곳이다. 증자가 말한 '부모가 온전히 낳으심에 자식이 온전히 돌아간다.'라는 한마디 말로써, 천년이 지난 뒤에도 마음을 수련하는 법도를 잘알겠다. 생각건대 이 암자에서 선생이 말한 것은 증자의 말이며, 온전한 것은 증자의 온전함이라. 증자도 암자가 있었던가? 암자가 있지는 않았어도 암자의 기업, 문호. 간가는 '세 번 반성하는 때 얻었고, 닦고 다스린 것은 '네라고 대답하는 날'(일유지일)에 얻었으니, 이렇게 말함으로써 후학을 가르쳤다. 가령 암자라고 한다면, 증자

묘정비

월봉서원 묘정비문 병서 조선조 명종선조 년간에 문운이 빈빈하고 사류가 성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대에 겪은 사화의 남은 불씨가 아직도 척신과 같이 간인의 사이에 남아 있어서 은밀히 선비를 해치는 재앙을 밎고 있기도 했. 이런 때를 당해 힘써 독류를 배척하고 청의를 끌어당기며 의리를 밝혀 학문이 이룩되고 도가 높아 우뚝하게 유종이된 분은 가로되 고봉 기선생이시다. 일찍이 사헌부 집의가 되어 경연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천하의 일에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없사옵니다. 옳고 그름은 비단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

덕성군 유허비첨부파일

공의 휘는 진이고 자는 자순이고 성은 기씨이고 행주인이니라 증조의 휘는 건이고 판중추부사이고 시호가 정무이며 조부의 휘는 축이고 풍저창부사이고 증직이 좌승지에 이르렀으며 고의 휘는 찬이고 홍문관부응교이고 증직이 이조참판이고 비는 파평윤씨와 안동김씨인데 한가지로 증직이 정부인이니라 공이 성화 정미 십이월 정해에 출생하였는데 출생하여 육세에 고자가 되었으며 이미 성장함에 고상한뜻이 있음으로 모제인 준으로 더부러 학문을 하되 날로 수십백의 말을 기억하였으며 드디어 힘을 다하여 문자의 사이에 경사를 쫓으로 금고를 파고들면서

덕성군 묘비첨부파일

선부군의 휘는 진이고 자는 자순이고 행주인이니다 증조의 휘는 건이고 판중주부원사이고 시호는 정무공이고 비는 정경부인 홍씨 이며 조부의 휘는 축이고 풍저창부사를 행하고 증직이 사헌부장영이고 비는 숙부인 정씨이며 고의 휘는 찬이고 홍문관부응교이고 비는 숙인 김씨이니라 부군께서 성화 정미년 십이월 정해에 출생하였는데 출생하여 육세에 부친께서 사망하섰으며 이미 성장하여서는 고상한 뜻이 있어서 모제인 준으로 더부러 학문을 하면서 날로 수십백의 말을 기억하고 드디어 힘을 다하여 문자의 사이에서 경사를 쫓으고 금고를 파고들면서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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